초월성과 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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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간만에(?) 가평으로 엠티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속해있었던 대학의 한 학술동아리의 엠티 겸 총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시간들이었지만,
전 무언가 가슴 속에 풀리지 않은 문제들이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그 모임에서는 모임의 '정체성'에 대한 토론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정체성이 정해져야지 다른 활동들이 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의 '수목적 사유'를 이룹니다.
즉,
뿌리라고 여겨지는 '정체성'이 존재하고 그 뿌리를 타고 올라갔을 때
여러가지 활동들이 열매처럼 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유서 깊은, 뿌리 깊은 사상인 '초월성'하고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초월적 존재를 상정함으로서 서로에 대한 위계를 명확히 하는 것이죠.
기독교에서는 그 초월적 존재를 '신'으로 제시하고 그에 대한 위계를 그렸으며,
서양의 근대 철학에서는 '이성'을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것은 여러가지 활동들, 생각들에 있어서 정확한 위계를 상정합니다.
가장 초월적인 존재, 모든 것의 근간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존재하고
모든 것은 그에 대해 하위에 존재하며,
초월적 존재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위의 제가 이야기했던 모임에서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결정되지 않으면,
아무런 활동들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이죠.
쉽게 예를 들어보면 체스를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체스에는 말들이 서로의 위상을 정확히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말들은 왕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왕이 죽으면 게임도 끝이 납니다.
서로가 가지는 행동도 자신의 위상에 따라서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비숍의 경우에는 대각선으로 움직일 수 있지요.
이것은 서구사상의 오래된 특징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초월자적 존재를 가지는 어떠한 것으로 모든 것이 환원되고,
어떠한 이야기를 하든지 그 초월자적 존재안에서 이해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계들은 매우 닫혀있으며, 오직 그 구조안에서만 이야기됩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외부를 상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초월자적 존재로 수렴되기 때문에
외부에 대한 사고가 생기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외부에 대해서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여기서 그 초월적 존재를 제거한다면 어찌될까요?
그렇다면 모든 것은 초월적 존재를 거치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부딛치며 충돌하겠지요.
이러한 모습은 위에서 보았던 수목형 구조와는 다르게 하나의 뿌리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양파처럼 어떤 것이 뿌리인지, 어떤 것이 줄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것을 철학적 용어로 '리좀'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서로가 서로의 위계에 따라서 자신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어떻게 교차하고 접속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리고 어떠한 초월자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내재성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외부를 상정하게 됩니다.
외부와 어떻게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외부에서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느냐가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되는 것이죠.
다시 쉬운 예를 들어서
바둑을 예로 들어봅시다.
바둑은 그 돌들이 가지는 속성이 아니라,
그 돌들이 서로 어떻게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에 대한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체스와는 중심적으로 두는 가치가 매우 다르지요.
따라서 이것은 어떠한 하나의 것으로 수렴할 필요가 없이,
서로가 어떻게 교차해 나가는지,
서로가 어떠한 선을 그어가는지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두가지에 대한 비교의 예를 다시 들어봅시다.
언어학을 이야기해볼까요?
예를 들어서 촘스키의 경우에는 모든 언어들을 X축(결합축)과 Y축(계열축)이 이루는
하나의 평면에 위치 지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언어의 체계를 하나의 '불변적'인 것 - 뿌리 - 으로 보려는 하나의 시도입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들 중에는 '초월성'과 관련이 깊겠지요.
하지만 언어의 체계를 언어가 쓰이는 환경에 결부해서 이야기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제가 '나가세요' 라는 말을 쓰면서 웃음을 지을 수도 있고, 얼굴을 찡그릴 수도 있습니다.
이 때,
한 단어의 의미는 외부의 어떠한 대상과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이것은 언어를 하나의 고정적인 체계로 두려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어떠한 환경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두기 때문에
'리좀'적 사고에 결부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초월성과 내재성은 그것의 사유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며,
그것이 가치있게 두는 초점도 다릅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초월성을 갖는 존재에 대해서 밝히는 것을 매우 가치있게 여긴다면,
후자는 서로가 어떻게 교차하는지, 그리고 충돌하는지를 밝히는 것을 더 가치있게 둡니다.
전 이 둘 중에 후자의 생각에 더 가깝다고 생각을 합니다.
전자는 모든 것을 일자적인 것으로 환원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자는 그 초월자가 만들어지는 과정이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적일 경우가 다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 어제의 엠티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생각하고 있는 부분들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니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가치의 방향들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맞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문득 '정체성'이 구성되는 과정과, 그리고 그것이 '형성'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을 잘 알게되면,
좀 더 저의 판단에 대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시 주변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가진 책이나 좋은 문헌들을 알고 계신 분들이 계신지요?
있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외부와 어떻게 만나는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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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성과 초월성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알기쉽게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이해가 잘되었습니다!
저도 대학 동아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정체성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 부분에서도 매우 흥미로웠구요
여튼 정말 잘 읽고 갑니다~!^^
앗!! 감사합니다^^
사실 요즘에 거의 3달간 포스트를 못하고 있어서 가끔씩 들어오는데, 오래전에 쓴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매우 반가웠어요. 그 댓글에, 그리고 제 자신의 과거의 글에 말입니다. 덕분에 다시 예전의 생각을 돌아보게 되었네요. 링크라도 걸어주셨다면 좋으셨을텐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