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에 대한 고찰 - 근대사회의 기계, 유기체, 접속가능한 기계

요즘 인간의 몸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인즉 수업을 듣다보면 인간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기 때문입니다.
한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전기절약을 위해서 에어콘을 켜지 않는 것은
그만큼의 노동력 절감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옳은 방법이 아니다."
"절약을 하는 행위 - 가까운 거리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것등 - 는
단순히 보이는 수치 - 전기료 - 만을 절약하기 위한 것이지 그렇게 해서 힘들어진 몸이
일을 적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왜 생각하지 않느냐."
라는 말씀이십니다.
더 많은 이야기들을 하셨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위의 맥락으로 이야기하고 계시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경험상으로 과학이나 공학을 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어떠한 수치나 기준으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현상은 뚜렷하게 해석되거나 드러나기를 바라는 것 같고
어떠한 일정한 시스템을 가지고 사물을 관찰하는 경향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경향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것이지요.
바로 위의 교수님께서도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몸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의 몸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해석하고 고정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밥을 먹었다면 그만큼의 에너지가 내 몸 안으로 들어왔고
그러하기 때문에 나는 그만큼의 에너지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어떠한 일로 몸의 에너지가 손실되었다면,
그만큼의 일을 충족시켜줄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제로 제가 속해있는 화학공학에서 배우는 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내가 해석해야될 시스템이 A라고 한다면
그 A라는 시스템에 들어가는 양이 얼마이고, 나오는 양이 얼마이고,
그 안에 머무르는 양은 얼마이고, 이러한 것이 계산되어야지만
그 시스템의 안정성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풍선에 들어갈 물의 양을 생각하지 않고 마냥 물을 풍선에 넣는다면
그 풍선은 언젠가는 펑하고 터지고 말 것입니다.
출구가 매우 좁은 하수도에 갑자기 많은 물들이 몰려든다면 그 하수도는 견디지 못하겠지요.
위의 교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우리가 수업시간에 배우는 시스템으로 이해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의 근대사회에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뉴턴의 과학혁명과 더불어서 모든 것을 역학의 세계로 해석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 안의 사람의 행동, 몸 역시 그렇게 해석되었습니다.
신체의 일부분들이 어떠한 운동법칙을 따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이 되었고
하나의 움직이는 기계로 바라봤던 것이였죠.
단순한 기계, 에너지들의 합, 그것이 인간의 몸이었던 것입니다.
역시 위에서 말씀을 하셨던 교수님도 이러한 관점에서 몸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에너지, 운동량의 합으로 인간의 몸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쉽게 인간의 몸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연 그가 무엇을 했는지만을 안다고 해서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몸을 유기체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일부분, 일부분들은 각각 따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몸 안에는 그 구성요소들 간의 교류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단순히 구성요소들 간의 합이다라고 더이상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팔의 운동이 멈춘다고 해서 단순히 팔만의 에너지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갑자기 팔을 못써버린다고 했을 때,
다른 신체의 기관들은 팔의 역할을 대신해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발로 그림을 그리시는 분들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요.
그러나 인간의 몸을 유기체로 바라보는 것에는,
때로는 이를 확장하여 조직이나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것에도
한가지 결정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 몸 안에서만, 그 조직 안에서만, 그 사회 안에서만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기체를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통일성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몸을 유기적으로 해석할 때 '어떠한 목적'하에 그 안의 구성물들을 생각하게 됩니다.
보통 인간신체의 구성물들을 유기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 안에서만 이야기됩니다.
몸을 구성하는 구성물로만 이해되고, 몸 안에서만 유기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관점은 몸 바깥에서 몸의 구성물들을 사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장은 인간의 몸에 피를 돌게 해주는 것으로,
폐는 인간의 몸에 산소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목적하에 마구 나열한 것이 아니라 통일성있게 나열된 것이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주로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요소로 말입니다.
유기체 안에서는 밖이란 없으며, 오직 안만 존재합니다.
조직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사회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의 몸을 다시 사유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접속가능한 기계'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손을 단순히 인체의 일부분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젓가락과 만났을 때에는 집는 기계로서 보고
그것이 망치와 만났을 때에는 두드리는 기계로서 보고
그것이 배구공과 만났을 때에는 운동하는 기계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은 근대사회의 기계의 관점과는 다르게 서로 간의 소통을 바라보게 되고
유기체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바깥까지 사고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손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과 결합하느냐가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손이 단순히 잡는 신체의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젓가락, 망치, 배구공등과 만날 때마다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방망이는 야구선수와 만났을 때에는 운동하는 기계가 되고
그것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다스리는 도구로 이용되었을 때에는 폭력기계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몸덩이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이 어떻게 교류하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얼굴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굴에 난 점이 매력점이 되었을 때에는
그 점은 이미 몸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폐, 심장, 허파등등으로 구성요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외부와 어떻게 만나는지에 대해서 다른 곳이 중요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볼까요?
내가 계단을 걷는 것이 단순히 에너지를 소모하는 행위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것과 연결되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계단을 내가 목표로 했던 운동의 일부로서 올라간다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 더 많은 힘을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체벌의 일종이었다면
그것은 가벼운 체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일의 능률을 떨어뜨릴 수도 있습니다.
절약을 위해 에어콘을 껐다면
그의 몸은 차가운 물과 만날 수도 있는 것이고 시원한 바람과 만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을 바라보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역시 누군가는 인간의 몸을 다르게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을 어떠한 방식으로 바라봐야 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본인에게 잠재력이나 가능성을 가져다 줄 것인가,
어떻게 바라보는 것이 현재와 미래를 적극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요?



Leave a commen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