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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비판

이 글은 '프란츠 부케티츠'의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 서적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1. 자유의지

저자인 프란츠 부케티츠는 본인의 책 '자유의지, 그 환상의 진화'를 통해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개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그는 흔히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유의지는 환상이며, 그 환상은 긴 시간에 걸쳐 진화해 왔다가 이야기한다.

자유라는 개념은 정치영역, 경제영역, 사유영역, 다른 여타 영역에서 제 각기 정의되고 있으며, 따라서 자유라는 말은 잘 못 사용하면 그 오해의 소지가 매우 크다. 에리히 프롬이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를 통해서 구별하고자 했으나, 이 역시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비판되고, 재해석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자유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본인의 생각을 정리해 나간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자유라는 말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으면, 그의 생각에 대한 오해를 남길 여지가 다분하다. 그가 사용한 자유의지를 정치적 영역에서 사용하는 자유의지와 혼동해 버린다면, 결과적으로 그의 생각을 완전히 곡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어떤 의미로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는 책의 맨 앞부분에서 자유의지에 대해 논한다. 그는 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본성과 '대립'되는 것으로, 따라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신의 고유한 본성에서 해방시켜야 한다(p.40)'고 생각한다고 평한다. 그들은 '자유의지'라는 것을 '본성'과 대립되는 것, 즉 본성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결과 '자유의지'는 물질세계와 다른 차원을 가지는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이원론의 세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 - 생물학적인 한계 - 에 벗어난 모든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여타 동물들과 차별점을 두기 위하여 발달되고, 고안된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유의지를 논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자유의 개념을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정치적 자유와 유심론, 영혼, 여타의 자유 개념을 분리해서 사용하지 않는데 이는 그가 그에 대한 고민이 없었거나,- 철학자인 그의 위치를 봐서는 그러진 않았을 거라는게 내 생각이다. - 굳이 구별해서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것들이 같은 층위를 가지는 - 본성과 대치되는 것으로서 - 하나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자유의지'는 유심론으로 이해될 수 있고, 기독교에서 사용되는 영혼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또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모든 자유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자유의지'라는 것은 본성과 대립되는 것에 위치한 모든 것이다. 이는 뒤에서 다루겠지만, 큰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그렇다면 본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있어서 본성이란 생존이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생물학 작용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는 그의 책에서 거의 대부분의 예를 생물학적인 현상을 제시한다. '그 누구도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 오히려 허기와 갈증이 우리의 태도와 행동을 전적으로 결정한다.(p.44)'는 말은 그의 생각을 명확히 대변해 주는 말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 역시 다른 여타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하나의 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자유의지'가 사라진 인간을 여타 동물들과 같은 심급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정신 현상이란 뇌 '시스템의 특성'이라는 것이 요점인데, 이는 특정한 기관들(주족, 날개, 지느러미)의 특성이 운동인 것과 마찬가지다' (p. 126)

결과적으로 그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분법적인 생각에 반대하며, 모든 것은 '생물학적' 물질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다고 사유한다. 이는 사적 유물론, 기계론적 유물론과도 다른 층위를 형성한다.

2. 신

그는 신의 존재 역시 위와 같은 이유로 부정한다. 인간은 어떠한 하나의 목적을 가지는 합목적적인 개체가 아닌, 생존을 위해 프로그래밍된 개체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것도 역시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부분에 있어서 주목해야 될 결과를 낳는데 그의 말을 빌리면 이와 같다. '컴퓨터는 인간이 '만든' 기계이다. 제아무리 복잡하더라도 그 기계를 동물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기계는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갖고 있지 않다. 그 기계의 '역사'는 오로지 안간의 기술 혁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p.148)' 이는 그가 기계론적 유물론에 대해 구별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컴퓨터는 그 사유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할 지라도 '신' - 여기에서는 인간 - 의 존재가 존재하는 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해 합목적적으로 발달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하기 때문에 컴퓨터는 개체의 지위를 지니지 못한다.


3. 진화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 진화라는 것은 어떠한 목적을 지니지 않는 것, 즉 생존의 결과물일 뿐이다. 진화의 방향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정신의 모든 '활동' 역시 뇌의 작동 표현이라는 것으로 환원한다. '우리 정신의 모든 "활동"이 뇌 작동의 표현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우리의 정신은 더는 수수께끼가 아니다.'(p. 129). '이러한 "인식 능력들 간의 상호 보강"의 결과가 자유의지라는 이념이다.'(p.115)


- 문제제기에 앞서

현재 많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의 사유활동이 뇌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본인의 생물학적인 현상 - 에너지 섭취, 배뇨 등 - 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없다.


a. 무엇이 생물학적인 현상인가?

프란츠 부케티츠는 모든 것들을 생물학적인 욕구들로 환원시킨다. 그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 섭취, 배뇨 등 다양한 '말 그대로' 생물학적인 현상들로 인한 생존을 강조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은 뇌의 산물로, 인간의 다양한 활동들은 인간의 호르몬 내지 다양한 자극들에 의한 반응으로 환원시킨다. 결국 모든 것이 인간의 몸에 의한 작용으로 환원시킴으로서 그의 생물학적 유물론을 완성짓는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이야기한 유명한 미디어학자 '마샬 맥루한의 연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피커는 우리의 목소리가 확장된 결과이고, 카메라는 우리의 눈이 확장된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현재 이 글을 쓰면서 사용하고 있는 키보드는 무언가를 쓰는 손의 확장일 수 있겠다. 빨대는 입의 연장일 수 있곘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내가 보고 있는 모니터, 키보드 모두 인간의 생물학적 기능의 연장인 것이다.

프란츠 부케티츠는 본인의 논지를 명확하게 인간의 몸에 한정시킴에 따라 오히려 본인의 논지를 한없이 축소시키고 말았다. 그는 뇌, 호르몬, 감각 작용 등 인간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b. 무엇이 문화적 현상인가?

더 심각한 문제는 과연 그것이 생물학적인 현상인가, 문화적 현상인가 명확하게 나눌 수 있냐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논지를 따라 유심론과 유물론의 명확한 이분법에 대해서 반대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은 생물과 문화를 명확히 나누는 이분법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라는 것은 생물학적 현상(그가 이야기한)으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모든 것이며, 생물학적인 현상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에 따라 그를 제외한 모든 부분이 문화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것이 가능한 것인가?

쉬운 예로 피임을 들어보자. 피임은 과연 인간의 생물학적인 현상인가? 문화적 현상인가? 여성의 가슴은 수유의 공간인 것인가? 아니면 남성 성적 환타지의 공간인 것인가? 우리가 더 맛있는 음식을 찾아 다니는 것이 생물학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문화적 현상인가? 우리의 음주 - 특히 과음은 문화적인 것임과 동시에 생물학적인 영향을 끼친다. 부케티츠가 예로든 인간의 배뇨활동은 어쩔수 없는 것이지만, 노인분들, 요실금 환자를 위한 성인용 기저귀는 문화적 현상인 것일까? 생물학적으로 바라봐야 되는 것일까?

앞의 전제에서 말했듯이 생물학적인 현상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모든 활동들은 생물학적인 활동이면서, 문화적 활동이다. 아니 이제는 그 둘의 구별 역시 쉽게 가를 수 없을 만큼 혼재되어 있다. 부르디외는 그의 연구에서 계급에 따른 문화적 현상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이를 단순히 생물학적인 현상의 연장선인지, 문화적 현상만의 영역인지 나누는 것은 또 다른 연구를 요한다.


c. 결국은 생존의 문제이다.

이미 위에서 어렴풋하게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정치활동을 생존의 문제로 보아야할 것인지, 자유의지의 발현으로 봐야 되는지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정말로 결국에는 생존의 문제에 기반한 것일지, 아니면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쓰고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니면 자유의지라는 환상을 가지고 생존의 문제에 관련 없이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막스가 이야기했던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생존의 문제인가, 아닌가? 현재 비정규직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많은 주제들은 생존의 문제인가, 아닌가? 교육은 인간 생존의 문제인가, 아닌가? 다양한 지적 활동들은 인간의 생존활동인가, 아닌가? 다양한 전쟁들은 인간의 생존활동인가, 아닌가? 내가 돈을 버는 행위는 생존의 문제인가, 아닌가? 우리 안,밖으로 이러나고 있는 다양한 활동들에 대해 어떠한 것이 생존의 문제인지, 어떠한 것이 생존의 문제가 아닌지 이야기할 수 있는가. 오히려 역사적으로 어떻게 억압의 역사가 진행되었는지, 그렇기에 때문에 그 억압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저술한 마르크스 - 그의 의견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 는 억압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생존의 문제를 명확하게 집어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d. 자유의지

필자는 유심론을 믿지 않는다. 또한 현재 거의 모든 철학자들도 유심론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자가 이야기했던 많은 말들에 대해 대부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지를 좀 더 세심하게 나누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정치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자유라는 말은 어쩌면 생존과 가장 밀접한 개념일 수도 있다. 그는 유심론에서의 자유와, 유심론이든, 유물론이든 그에 바탕이 되어 생성된 자유라는 말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그 역시 언어작용에 있어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그가 너무 생물학적인 문제들에 치우침으로서 놓쳐서는 안될 가치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용어로서의 평등과 자유는 자유의지가 아닌, 생존의 또 다른 표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만약 인간의 역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인간 생존의 문제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단순히 생물학적 지식을 이용한 그물로 포착하려고 할 때에는 잡히지 않는다.


e.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결국 그의 이야기 중 몇부분, 신에 대한 문제, 컴퓨터에 대한 문제, 진화에 대한 문제 등을 제외한 생존과 생물학적 현상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결국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셈이 되어 버렸다. 니체는 자신의 저작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부제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인을 위한 그리고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그의 몇몇 독창적인 생각을 제외하고 그의 핵심적인 생각들은 그리 많은 것을 전해주지 않는다.


f. 베르그송의 과학 비판

과학은 시간의 항목을 제거하는 학문이다. 시간을 한없이 잘게 나눔으로서 - 미분 -, 혹은 공간의 영역에 포섭하는 학문이다. 뉴턴의 과학은 그것이 어느 시간 때에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관성의 법칙은 1800년대에도, 1900년대에도 동일하게 설명된다. 과학은 시간의 영역을 제거해 버림과 동시에 모든 것을 공간의 영역에 펼쳐 놓는 학문이다. 진화론도 이에 해당한다. 50억년의 지구 역사를 포섭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단일한 명령을 가지고 말이다. 초기의 생물학자들은 종이라는 그물망으로 생물의 역사를 포섭하려고 하였고, 다윈은 개체라는 보다 촘촘한 그물망으로 포섭하려고 하였다. 현재에 있어서는 분자생물학, 도킨스에게 있어서는 유전자라는 보다 촘촘한 그물망으로 역사를 해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물망일 뿐이다.

제논의 역설을 살펴보도록 하자. 제논은 100m 앞의 거북이와 사람의 달리기를 통해서 사람은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즉, 거북이의 걸음이 아무리 늦더라도 아킬레스가 원래 거북이가 있던 곳까지 따라왔을 때 그동안 거북이는 얼마쯤은 전진해 있다. 다음에 아킬레스가 다시 거북이가 있던 두 번째 지점까지 왔을 때도 거북이는 그래도 얼마쯤은 전진해 있다. 따라서 아킬레스는 결코 거북이를 추월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를 급수를 이용해서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이는 둘이 한없이 같아질 수 있다고만 설명할 수 있을 뿐, 추월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이는 시간의 영역을 공간의 영역으로 환원시켜서 설명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베르그송은 시간의 영역을 공간의 영역으로 환원시켜서 해결하려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 이야기를 한다. 이 문제 역시 시간의 영역을 도입시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된다.(네이버 지식인 참조)

결국 과학은 시간의 영역을 제거하고 공간의 영역만을 남겨 두지만, 진화라는 것은 '차'이와 '생'성을 만들어 낸다.(차생) 과학적 사유방식은 이 차생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한계가 있다.


Ep. 

유심론을 포기하고 유물론으로 개체로서의 인간을 잡아내는 것은 또 다른 작업이다. 현재 많은 현대 철학자들의 화두는 바로 이 '개체화 이론'이며 이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오가고 있다. 또한 인간과 다른 여타 생물간의 차이성,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동일성의 사유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009/04/28 00:04 2009/04/2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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